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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상륭 전집 제작 경위
작성일자 2021-07-21
조회수 188
이 전집의 ‘기획-편집-북디자인-제작 사양’ 전반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겠다, 라는 생각에 기록하듯 적는다.


1. 기획-편집

박상륭 작가의 출판권을 독점하고 싶지 않았다.
앞서 세 곳 출판사(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책들은
그것대로의 문학사이니 그대로 남기고 싶었다.
그러니, 그렇다면, 다르게 구성하고 싶었다.
(똑같은 단행본으로 만들면 변별성이 없을뿐더러, 결과적으로 경쟁해야 하므로)

대작 「칠조어론」을 한 권으로 묶고 싶었다.
분량은 약 8,500매(200자 원고지 기준).
한 페이지당 5매(200자 원고지)씩만 넣어도 무려 1700쪽.
1600쪽이 넘으면 제본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제작처의 난색을 마음에 새겨두었다.
(이 문제는 뒤에서 ‘북디자인’ 얘기로 이어질 테다)

「칠조어론」(1556쪽)을 한 권으로 묶겠다고 결심하자
그 물리적 비율에 따라 자연스레
‘중단편’(1408쪽), ‘장편/산문’(1332쪽)으로 구성했다.
전작(全作)의 상당량의 ‘주석’은 별책(272쪽)으로 빼 묶었다.
각 권 책 끝에 붙는 미주(尾註)를 읽기 위해 독자가
책의 앞뒤를 오고 가는 수고를 덜어 주고 싶었다.
(실제로 한 애독자는 앞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칠조어론」의 주석 부분만 도려내어
철끈으로 묶어서 읽었다고 말했다)

「박상륭 전집」은 ‘세트’로만 유통되어 판매된다.
앞서 출간된 저작들이 단행본으로 유통되기에 충돌을 피했다.
독자는 마음에 따라,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전집은 ‘박상륭 전집: 중단편’의 첫 편인 「아겔다마」부터
‘박상륭 전집: 칠조어론’의 마지막 편인 「칠조어론 4」까지
전체 쪽수를 연번(連番)으로 매겼다.
그러므로, 평론, 논문 등의 글을 쓸 필자가
그 출처를 밝히기에 손쉬울 것이며,
복잡하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단일체로 아우른 편집 효과를 이로써 표현하고 싶었다.

특히 「칠조어론」의 경우,
漢字를 한글과 병기(倂記)하지 않고
원고대로 한자만 노출해 편집했다.
이는, 두 가지 까닭 때문이다.

첫째, 작가가 살아생전에 전집이 진행되었다면
‘병기’에 대해 독자의 편의를 위해 충분히 제안할 만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작가는 2017년 7월 1일에 타계하셨다.

둘째, 한자에 따라서는 독음(讀音)이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역시, 작가에게 여쭐 수 없음에 임의로 편집할 수 없었다.
(가령 그런데도 그랬다면,
이 전집은 ‘정본’이라고 말할 수 없을 테다)

전집 끝에 붙여 쓴 ‘편집 후기’에도 밝혔듯이,
「박상륭 전집」을 편집하는 동안
앞서 세 곳 출판사에서 출간된 단행본들에서
적지 않은 오자와
독서를 방해할 만큼의 잘못된 띄어쓰기,
통일되지 않은 낱말 표기들을 발견하여 신중히 바로잡았다.
(따라서, 이 전집이 박상륭 전작(全作)의 정본이 되었다)
관련한 내용은 전집의 ‘편집 후기’에 적어 두었다.


2. 북디자인

2016년에 1808쪽의 단 한 권으로 출간된 「셰익스피어 전집」을
디자인하여 그해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가 선정한
‘제1회 타이포그래피가 아름다운 책 2016’을 수상한
북디자이너(박연주씨)가 당시 편집자와의 파트너십을 되살려
「박상륭 전집」의 디자인도 맡았다.

편집자가 본 「박상륭 전집」의 북디자인의 콘셉트는
‘타이포그래피+인포그래피’이다.
우선, 본문은 페이지당 5.8매(200자 원고지)나 담았음에도
(폰트가 조금 작을 뿐) 읽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
서체, 자간, 행간, 여백의 균형을 잘 맞춘 까닭이다.
그렇잖아도, 잘 안 읽히는 작품을 그나마
잘 읽히게 디자인한 셈이어서 편집자로서 만족한다.

표지 디자인은 인포그래피로 구성했다.
전집에 나누어 묶은 네 권의 책마다,
수록된 작품들의 물리적 분량을 구획 삼았는데,
그것은 작가의 복잡하고 난해한 문장과 문체를 연상시키듯
작품들의 지형도를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전위적인 디자인이어서,
자칫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
얽히고설킨 듯해 보이는 디자인 구성이
오히려 박상륭 작품 세계에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 하나.
예사롭지 않은 안목을 지닌 독자라면 알아차리겠지만,
「박상륭 전집」의 표지와 케이스 인쇄는
검정 잉크조차 쓰지 않고 ‘별색 1도’로만 디자인했다는 것이다.
(별색 번호: 팬톤7476c)
전집의 책 중에서 ‘박상륭 전집: 주석과 바깥 글’을
그 별색의 100%를 적용했으며, 그다음에 한 권씩 ‘톤’을 낮추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전집을 보면,
재밌는 설정의 디자인임을 느낄 수 있을 테다.

또한, 편집자인 나는 표지에
그래도 ‘박.상.륭’만큼 ‘전집’이라는 글자를
크게 넣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했지만,
‘박.상.륭’이라는 이름에
이미 ‘전집’이 절제되어 나타나 있지 않느냐라는
다시 드는 생각에, 편집자로서 수용했다.
책등을 ‘박.상.륭’으로 구분한 것은 나의 제안이었으므로.
(그러고 보면, 이 북디자이너와 이 편집자는
전에도 그랬듯이 손발이 잘 맞는다)

3. 제작

표지는 평범한 종이(300g 스노우 화이트)이다.
대신, 코팅은 최고급으로 제작했다.
벨벳 코팅. ‘스킨 코팅’이라고도 불리는
이 코팅은 말 그대로 부드러운 피부 같을뿐더러
코팅 두께가 상당하여
세월이 지나도 변색이 잘 안 되는 장점도 있다.
다만, 일반 코팅보다 제작비가 8배나 비싸다는 것.

본문 용지는 한국제지에서 생산한 ‘60g 카리스코트.’
이 종이는 얇은 두께에 비해 뒷면이 덜 비치고
빛 반사도 덜해 눈의 피로를 줄여준다.
책장을 넘길 때의 촉감도 좋은 편이다.

제본은, 내가 꼭 하고 싶었던 ‘PUR 제본.’
한국의 출판 편집자라면,
늘 갖는 불만 중 하나가 ‘무선 제본’(떡제본)이다.
500쪽만 넘어도 한겨울이면 쉽게 쪼개지기 일쑤인 까닭이며,
접착제에 유연성이 거의 없어서
책을 펼쳐 읽을 때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왜 서양 책 제본처럼
유연하면서도 견고하게 제본하지 못하냐?’라는
불만을 제작 담당자에게 던지곤 한다.

하지만, 근래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서양 책 제본 기술을 도입한,
‘PUR 제본’을 하는 제본소가 몇 곳 생겼다.
그 기술의 차별성은 ‘접착제’에 있다.

다만, 내가 「박상륭 전집」을 ‘PUR 제본’으로 발주하자
이만한 페이지와 두께를 해본 적이 없다며
제본소에서는 난색을 보였다.
그래도, 달래서 추진했다.
PUR 제본으로 제작된 책은 접착제가 뻣뻣하지 않아
책이 놓이는 대로, 활처럼 휘어지는 장점이 있는 만큼,
그 제본비가 두 배 이상 듦에도 꼭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결국엔) 성공을 했지만,
화들짝 놀라게 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생겼다.
제본된 책이 200부쯤 생산되다가 기계가 멈춰버린 것이다.
제본소는 파주에 있는데, 당시 기술자는 천안에 있다고 했다.
이튿날, 기술자가 아침 일찍 수리하러 왔지만, 고치지 못했다.
다시 이튿날, 우리나라에 한둘뿐이라는 전문가가 와서
간신히 다행히 제본기를 고쳤다.

그러고도, 문제는 또 생겼다.
책이 너무 두꺼워 일부 책,
특히 가장 두꺼운 ‘박상륭 전집: 칠조어론’의 책등에
기계에서 새 나온 접착제가 간혹 묻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접착제는 막 제본했을 때는
물처럼 투명해서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납품이 끝나고 접착제가 완전히 굳자
간혹 책등의 묻은 접착제가 눈에 띄었다.

일손 몇 사람 붙여 네 권의 전집을 케이스에 담고,
다시 골판지 상자에 넣으면서 나름 가려냈지만,
일부는 접착제가 묻은 상태로 포장된 듯하다.
예민한 독자로부터 거절된 반품은 당연히 받겠지만,
혹시, 구매한 전집에 접착제가 살짝 묻어 거슬린다면,
매니큐어를 지우는 ‘아세톤’을 티슈나 헝겊에 묻혀 문지르면 지워진다.
책 두께를 감당하지 못한 우리 제본 기술의 한계여서
안타깝지만 도리 없었음을 고백한다.

‘전집인데, 왜 양장본으로 만들지 않았지?’ 하는 글을 읽었다.
대답하면 이렇다:
전집임에도, 벨벳 코팅과 PUR 제본으로써
책의 견고함을 드러내고 싶었다.
또한, 실제로 책을 읽을 때는 (나는)
양장본은 외려 불편하다.

또 하나. 1500쪽가량의 책을
얇은 본문 용지로써 양장본으로 제작했을 때
자칫 표지와 본문지 사이가 쪼개지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책을 살살 다루지 않으면 그렇다. 즉,
단단한 표지(합지)가 한 덩이의 본문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표지와 본문지 사이의 면지에서 분리되는 것이다.
그 황당한 일은 겪어본 사람은 안다.
(사진을 첨부한다)
책을 사고서 1년쯤 지나서 그런 일을 겪으면 난감하다.

* 「박상륭 전집」이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에는
이런저런 고민과 궁리와 모색이 함께했다.
그 길을 유추해보는 일은 ‘공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책 보는 또 다른 재미에 닿을 것이다.
우리가 박상륭 문학을 확장하여 읽는 일처럼....​​